머나먼 타국에서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맞이한 죽음.
오래도록 같은 모습으로 더 많은 역할을 해줄 것이라 믿었던
동지와 선·후배들은
그의 부재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 유신 독재에 이어 전두환의 폭압에 맞서
민주화운동에 몸담았고,
제도권 정치에 뛰어들어서는 민주 정부 건설에 앞장섰던 삶.
◀ S Y N ▶ 고 이해찬 / 전 국무총리 (윤석열 탄핵 촉구 세종 촛불문화제, 2024년 12월 12일)
“저는 박정희 독재하고도 싸웠고 전두환 독재하고도 싸웠는데
이 같잖지도 않는 놈하고 싸우려니까 재미가 없습니다.”
오래 전부터 극도로 몸이 쇠약해졌고
73살이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면서
젊은 시절, 그가 군사정권에게 당했던 혹독한 고문 피해가
다시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15년 전 세상을 떠난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원을 비롯해 민주주의를 이뤄내기 전까지
수없이 많은 이들에게 가해졌던 비인간적인 고문 피해를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확신했던 고문.
하지만 12.3 내란 세력은 독재 정권과 함께 사장됐던 고문을
21세기에 다시 되살리려 했습니다.
◀ 최경재 기자 ▶
이해찬 전 총리는 생전에 자신이 당한 고문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꺼려왔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고문 기억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극단적인 공포였고,
더 심한 고문을 견뎌온 동료들의 희생에
그 역시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해찬 전 총리가 남긴 이 회고록.
여기엔 독재 정권 시절, 그가 당했던 고문의 기억도 서술돼 있는데요.
12. 3 내란의 우두머리를 단죄하는 첫 판결이 나온 지금.
<스트레이트>는 엄연히 존재했었고 지금도 그 피해가 진행 중이며
재현될 뻔 했던 끔찍한 '고문'의 피해를 재조명했습니다.
■ 이해찬·김근태와 '고문’
6,7년 전 즈음부터 이 전 총리의 몸 상태는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말투는 어딘가 어눌해졌고 손을 떨기도 했으며
주변의 도움 없이는 걷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습니다.
당 대표로서 총선을 진두지휘하던
지난 2020년 3월.
한동안 자리를 비운 것도 급격히 악화된 건강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 나타난 증상이 젊은 시절 당했던 고문의 후유증이란 말들이 나왔지만,
이 전 총리는 고문과 관련한 자신의 경험을 입에 올리려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91살, 어머니는 100살까지 장수했지만
혹독한 고문을 당했던 그는 73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 I N T ▶ 최민희 / 더불어민주당 의원·이해찬 회고록 대담자
“선배들이 고문 후유증이 노년에 나타나는 거 많이 봤거든요. 뭐, 그래서 그런 병이냐고 물은 적도 없어요. 그런데 그런 고문에 따른 후유증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고요.)”
지난 1972년,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20살 이해찬은
그해 박정희 정권의 유신 선언에 맞서기 위해
학생운동에 투신했습니다.
반독재 반유신 투쟁에 앞장서던 그는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됐습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반유신 투쟁을 하던 민청학련이
“공산주의자들의 배후조종을 받아 정부를 전복하고
노동정권을 수립하려는 국가 변란을 기획했다”고 조작했습니다.
◀ S Y N ▶ 대한뉴스 977보 (지난 1974년 4월)
"대한민국 내에 침투하고 있는 반국가적 불순분자들을 발본색원함으로써
국가 안보를 강화하고…“
이렇게 구속기소된 이들만 180명.
조작 수사가 가능했던 건 가혹한 고문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전 총리 역시,
'민청학련' 주동자로 수배받던 이철, 유인태의 행적을 추궁당하면서
고문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회고록에서 "고춧가루 고문을 당했고 하도 맞아서
'이해찬이 죽었다'는 흉한 소문이 났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또 "누군가 연탄집게를 빼서 '눈깔을 뺀다'고 들이댔다"며
"그 순간은 진짜 공포스러웠다"고 말했습니다.
◀ I N T ▶ 이철 / '민청학련 사건' 피해자
”그 미안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죠. 특히 그 저보다 일찍 잡혀서
더 고통을 받았던 후배들.. 몽둥이와 발길질, 주먹으로 매찜질을 당하는 건
모든 체포 과정에서 그 당시로서는 항상 있는 일이었으니까…“
투옥 1년여 만에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이 전 총리는
한동안 재야에서 활동하다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학교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군사독재 정권과의 싸움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전두환 신군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의 사주를 받아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을 배후 조종해 내란을 획책했다는,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했습니다.
이 전 총리도 계엄철폐 시위를 선동하며
내란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수사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중앙정보부 그리고 합동수사본부는 무자비한 폭행과 고문을 가했습니다.
이 전 총리는 회고록에서
"너무 많이 맞아 걸을 수 없어서 누운 채로 몸을 밀고 다녔다"며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야 되는데 허벅지 살이 터질 것 같았다"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군사법원에서 선고된 형량은 징역 10년형.
하나뿐인 딸이 태어나는 순간을 함께 하지 못한 건
평생의 한으로 남았습니다.
당시 이 전 총리가 부인인 김정옥 여사에게 보낸 옥중 편지엔,
"당신과 딸에게 고개를 못 들겠다"면서
"정성스런 마음으로 대하지 못해 안타깝다"며 애끓는 마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 I N T ▶ 최민희 / 더불어민주당 의원·이해찬 회고록 대담자
”아기가 그렇게 태어나고 교도소에 면회를 어머니하고 아내하고 딸이
같이 온 거예요. 돌아가는 모습을, 그걸 보고 정말 펑펑 우셨다고…“
2년 6개월여 만에 석방된 이 전 총리는
전두환 정권에 맞선 최초의 공개 투쟁조직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에 참여했습니다.
이 전 총리는 상임위 부위원장을 맡았는데,
이 조직을 이끌던 의장이 바로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원이었습니다
김 전 의원은 혹독했던 고문 피해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지난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간 김 전 의원은
온갖 구타와 물고문은 물론 심지어 전기고문까지 당했습니다.
◀ S Y N ▶ 고 김근태 / 당시 국회의원 (MBC 뉴스데스크, 1999년 10월 31일)
”전류를 때로는 강하게, 길게도 하고 또 짧게도 하고.
고통과 공포는 주되 사람이 목숨을 잃지는 않도록…“
김 전 의원은 생전에 당시를 회고하며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왔다",
"무릎을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노래를 속으로 불렀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정권의 힘으로 꽁꽁 감춰왔던 고문의 실상은
김 전 의원의 폭로로 실체가 드러났지만,
뼛속 곳곳까지 상처를 낸 고문 후유증은
결국 60대 초반의 나이에 그의 생명을 빼앗아갔습니다.
◀ S Y N ▶ 인재근 / 고 김근태 의원 부인 ('진실의힘 인권상' 연설, 2012년 6월 26일)
”발이 고문에, 고문을 많이 해서 딱지가 생기고 탄 자국,
전기 고문으로 탄 자국이 났던 그 사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김근태와 이해찬.
그리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 정권 하에서
고문을 받았던 수많은 피해자들.
◀ I N T ▶ 유인태 / '민청학련 사건' 피해자
”흔히 수사관들이 하는 얘기가 '너 하나 죽이는 거는 저 휴전선 근처에 가서
월북하려고 그러다가 총 맞았다고 하면 감쪽같이 그냥…' 실제 그 사람들이
그냥 입에 붙어서 하는 소리예요.“
1987년 6월 항쟁을 거쳐 이뤄낸 민주화.
6월 항쟁 당시 전국적인 시위를 기획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던 이 전 총리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민주화를 쟁취했던 그때를 꼽곤 했습니다.
◀ S Y N ▶ 고 이해찬 / 전 국무총리 (유튜브 '사람사는세상노무현재단', 2022년 9월 22일)
”군부 정권이니까 언제 총을 쏠지 모를 때니까 늘 죽음과 긴장 속에서 살았거든요.
그러다가 6월 항쟁이 끝나서 군부 독재가 끝났다, 그때 '아 내가 아 살았구나.
민주화가 됐구나.' 그건 제가 그때는 잊질 못해요.“
고문 피해자들에겐 고문이라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는 안도감이
가장 피부로 느껴진 변화였다고 합니다.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
지난 1962년 개정된 헌법부터
모든 국민의 고문받지 않을 권리가 헌법에 명시돼 왔습니다.
하지만 민주화 이전까지 이 헌법조항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고문받지 않을 권리.
헌법 12조 2항의 이 권리가 명실상부한 헌법적 권리로 확립되기까지는
민주주의를 위해 끔찍한 고문의 고통과 공포에 굴하지 않았던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 최경재 기자 ▶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에 고문과 같은
반인권적 국가폭력은 더 이상 없을 거란 게
당연한 믿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12.3 내란 세력은
이 땅의 민주주의를 40여 년 전으로 되돌리려 했고,
고문 계획까지 세웠던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끔찍했던 고문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피해자들에게
또다시 깊은 상처를 남겼는데요.
이들의 얘기를 자세히 들어봤습니다.
■ 또다시 느꼈던 '공포’
고 박종철 열사가 고문을 받다 숨진 바로 그 곳,
남영동 대공분실.
단단한 철문과 커다란 욕조부터
비명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벽에 붙인 나무판까지
모든 시설들은 오로지 고문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투신을 막기 위해 창문은 30cm도 되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천장에 몰래 설치한 고성능 마이크와 CCTV로
하루 종일 피해자들을 감시했고,
조사실 밖에선 조명을 조절하며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구조로 설계됐습니다.
이곳에서의 고문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잔혹했습니다.
지난 1981년 전두환 정권이 학생운동조직을 반국가단체로 몰아
대학생 수십 명을 불법 연행해 고문했던 일명 '학림 사건'.
무자비한 구타는 물론 관절을 뽑고
볼펜으로 손톱 아래 속살을 찌르는 등 온갖 고문이 자행됐습니다.
◀ I N T ▶ 유동우 / '학림 사건' 피해자
”볼펜 여기 끼워서 그냥 앞, 돌리는 거 뭐 그런 거는 진술 받는 과정에서 무수히
그런 건 있어요. 그리고 하도 이게 얼굴을 막 때리고 하니까 퉁퉁 부어있는 상태.“
관 안에 시신을 올려두는 바닥판 즉 '칠성판'에 팔·다리를 묶거나,
손목과 팔목 사이에 막대기를 끼워 공중에 매달아 놓는
이른바 '통닭구이' 고문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학림 사건'으로 7년형을 선고받았던 이선근 씨.
고문 후유증 탓에 출소 직후부터 3차례나 간암 수술을 받았고,
지난해부턴 뇌경색으로 오른 손과 다리를 거의 움직이지 못합니다.
◀ I N T ▶ 이선근 / '학림 사건' 피해자
”진료를 내보내달라고 해도 이들이 내보내 주지를 않았어요.수사 받고 나와서
교도소 생활을 하면서 한 5개월 정도 지났을 때 다리를 못 썼어요.
간암으로 이제 수술을 하느라고 젊은 시절을 다 보냈죠.“
고문은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 I N T ▶ 연성수 / '민청련 사건' 피해자
”4, 5일 정도를, 그러면 사람이 밥은 안 먹고 살 수 있지만 물은 못 먹고
못 살잖아요. 그래서 여기 보니까 이 뚜껑 있잖아요. 이 뚜껑을 열고
여기 있는 물을 먹었어요.“
성적 수치심을 주는 고문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 I N T ▶ 장영달 / '민청련 사건' 피해자
”책상 위에다가 성기를 꺼내 놓으래. 그게 단도 칼이 있단 말이야. 군대니까.
진짜 거기를 끊을 것 같아. 근데 그게 그렇게 공포스럽디다. 엄청난 공포로 와요.
지금도 그게 가장 섬찟해요.“
1986년엔 노동운동을 위해 공장에 취업했던
당시 서울대생 권인숙 씨를 체포한 뒤
조사 과정에서 끔찍한 성폭력을 자행한
'부천서 성고문 사건'도 발생했습니다.
겨우 고문을 견뎌냈다고 해도
풀려난 이후엔 감시를 받아야했습니다.
◀ I N T ▶ 이종구 / '민청학련 사건' 피해자
”나를 열심히 쫓아다녀요. 형사들이 들락거리니까 누가 좋다고 그럽니까?
회사에서 자연히 알려지게 되는 거죠.“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반달곰'으로 불리며
고문기술자로 악명 높았던 공안 경찰, 이근안.
김근태 전 의원을 비롯해 수많은 민주화 운동 인사들이
그에게 온갖 고문을 당했습니다.
민주화 이후 10년 넘게 도피생활을 하다 자수해 7년간 복역했지만
출소한 뒤 언론 인터뷰에선 "나는 애국자다",
"심문도 일종의 예술"이라는 망언을 쏟아냈습니다.
◀ S Y N ▶ 이근안 / 전 공안 경찰 (2012년 12월 14일)
”고문을 좀 했다 하더라도 일파만파 또 크게 부풀려서 하는 사람도 있고..
그게 애국 아니면 누가 가정도 모르고 열심히 목숨 내놓고 (일 했겠어요?)“
고문으로 조작된 자백과 증거들을 뻔히 알면서도
검사들은 기소했고 판사들은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지난 1982년 전북 김제에서 농사를 짓던 최을호씨와
조카 두명을 간첩으로 체포했던
일명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
이들의 간첩혐의는 재판에서 그대로 인정돼
최을호씨는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조카 한명은 구치소에서 숨졌고,
다른 한명도 출소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34년이 지난 뒤에야 "당시 진술이 고문을 받아 이뤄졌고
간첩 활동을 했다는 증거가 없다"며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지만 피해자들은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평온했던 집안을 풍비박산냈던 당사자들은
그 어떤 사과도, 반성도 없었습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이들을 고문한 사람은 이근안이었고
기소한 검사는 정형근 전 한나라당 의원이었습니다.
1,2,3심의 재판장들 모두
훗날 고등법원장이나 대법관을 지낸 뒤 퇴직했습니다.
◀ I N T ▶ 최OO / 김제 가족 간첩단 조작 사건 유족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고, 가정을 해체시키고, 잘못을 저지른 가해자가
TV에 나와서 있는데 울분이나 화를 참을 수가 없습니다.
잘못했다고 사죄하고 용서를 구할 때 용서가 되는 거잖아요.“
독재 정권 시절, 고문과 조작된 증거로 유죄가 선고됐다가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된 공안 사건은 현재까지 확인된 것만 100건이 넘습니다.
끔찍한 고문의 역사는
12.3 내란에서 다시 현실이 될 뻔 했습니다.
당시 노상원 일당은 "선관위를 손보겠다"며
작두와 야구방망이 등 고문 도구를 준비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고문 방법을 나열하고
심지어 약물로 자백을 유도하는 계획이 담긴
군 내부 문서가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 S Y N ▶ 박선원 / 더불어민주당 의원 (국회 소통관, 2025년 12월 11일)
”정치인과 시민을 잡아 가두고 고문, 협박해 내란 세력이 바라는
영구 독재, 전체주의 국가를 만들려고 했던 것 아닙니까?“
고문 피해자들은 내란 우두머리의 비상계엄 선포를 보며
가슴 속 깊이 자리잡고 있던 공포가 되살아났다고 털어놨습니다.
◀ I N T ▶ 임상우 / '민청학련 사건' 피해자
”군인 정보 계통의 세력들이 고문을 준비한다고 할 때 오히려 그때 더
현실감 있게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저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일지.“
◀ I N T ▶ 연성수 / '민청련 사건' 피해자
”(계엄) 그걸 듣는 순간 고문 받은 기억, 도망 다닌 기억, 가족들이 받은 피해
이게 다 드러나는 거야. 그러니까 제일 먼저 '어떻게 하면 내가 덜 당하지?
어떻게 하면 도망가지?' 그것부터 먼저 생각이 떠오르더라고.“
하마터면 재현될 뻔했던 끔찍했던 고문.
이번 12·3 내란만큼은 반드시 민주적 절차에 의한,
철저하고 단호한 법적 단죄가 필요한 이유를
가장 분명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 I N T ▶ 전우용 / 역사학자
”친일 청산을 못 했던 것처럼 87년 민주화 운동 이후에도 청산의 역량이
미진했던 거죠. 진실 규명으로 화해하고 넘어가자? 굉장히 미온적이거나
불완전한 해결책이었어요. 그런데 그조차도 어려웠어요. 왜? 그 사람들이,
그 거대한 가해자 집단이 우리 사회에 최상층 기득권, 언론 뭐 그랬잖아요.
누가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겠느냐.“
◀ E N 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