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잊혀진 '지게 부대’
흰 무명옷을 입고 지게를 진 사람들.
지게에는 전투식량을 뜻하는, 'C-6'라고 써진 상자가 실려 있습니다.
공터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군인들을 줄지어 따라갑니다.
군복과 전투모, 총칼로 무장한 군인들과 달리,
무명옷에 짚신을 신은 채 지게를 지고 있고, 손에 들린 건 나무 막대뿐입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찍은 민간인들입니다.
이 사진과 영상에 미군은 'A-Frame Army'.
즉 지게 부대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한국인들이 사용하던 지게가 알파벳 'A'를 닮아,
미군은 지게를 'A 프레임'이라고 불렀습니다.
6·25 전쟁의 숨은 영웅으로 불리는 이른바 '지게 부대'.
◀ I N T ▶ 이필준/당시 지게부대원
"사람 다치면 실어 나르고 들어다 나르고 죽은 사람들 하산시키고…“
소년티를 벗지 못한 어린 나이대부터 허리가 굽은 나이 지긋한 남성까지.
각양각색의 민간인들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선에 물자를 공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고, 수많은 이들이 전쟁터에서 희생됐습니다.
하지만 부대 규모도, 사망자 수도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못했습니다.
◀ I N T ▶ 양영조/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 부장
"전쟁 때 실제로 활동했던 분들의 그 인터뷰 자료에 가끔씩 이렇게 확인할 수 있는데 실제로 공식적인 문서에서는 거의 확인이 되지 않아요.“
◀ 조희원 기자 ▶
6.25 한국전쟁 당시 전선에 동원됐던
민간인 노무 부대를 가리키는 말 지게 부대.
이들은 왜, 어떤 방식으로 전쟁에 동원됐고,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던 걸까요.
국방부와 국가보훈부, 국가기록원 등에는
의미 있는 자료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스트레이트는 지게 부대라는 이름을 붙이고 영상까지 남겨놓은 미군,
구체적으로 미 육군 군사사센터에 정보공개를 청구했습니다.
그 결과 지게 부대에 관련해 알려지지 않았던
중요한 기록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 "사실상 강제동원“
경북 칠곡군의 다부동 전적기념관.
다부동 전투는 55일간이나 지속된, 한국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의 하나로 꼽힙니다.
당시 다부동 유학산 고지에서는
약 2천3백 명의 국군과 유엔군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 I N T ▶ 황나연/다부동 전적기념관 부장
"제가 이 지역 토박이거든요? 할머니 얘기를 들어보면 6·25 전쟁이 끝나고, 저 유학산 전투가 끝나고 나서 한 2년 동안 여기 비가 오면 저 산에서 핏물이 줄줄줄 흘렀대요.“
총탄이 빗발치는 전선으로 탄약과 식량, 물을 날라준 건 민간인 노무자들.
'지게 부대'가 있었기에 국군과 유엔군은
다부동 전선에서 55일을 버틸 수 있었습니다.
1950년 8월, 칠곡 다부동 전투 현장에 있었던 지게부대원 도용복 씨.
만 7살 어린 나이에 가족과 피난길에 나섰던 도 씨는
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가족과 함께
민간인 노무부대원으로 지원했습니다.
◀ I N T ▶ 도용복(1943년생)
"영천서 이제 소식을 듣죠. ‘야, 너 그렇게 배고파할 필요 없어. 칠곡 다부고지에 올라가면, 총알 날라 주면 밥을 준대’ 거기서 귀가 번쩍 뜨이는 거예요.“
그러나 현장은 생각했던 것과 너무나 달랐습니다.
◀ I N T ▶ 도용복(1943년생)
"총알을 매고 올라가는데 막 시체가 내려 떨어지는 거예요. 그냥 막. 와서 턱 걸리면 나도 모르게 밟아야 되는 경우도 있고. 기절하죠. 그래 막 어쩌다가 잘못해서 시체를 밟으면 막 뒤에 할아버지들이 꼴밤을 주지. '이놈의 자식들아. 정신 차려라.'“
빗발친 포격에 고지 주변 나무들이 불에 타버리면서
이들의 흰 무명옷은 그대로 적군의 표적이 됐다고 합니다.
◀ I N T ▶ 도용복(1943년생)
"저희는 더 잘 보이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때는 전부 다 이 옷 입은 것이 전부 한복인데 전부 흰 거거든요. 그때 이제 친구들이 8살, 7살, 9살. 5명이 갔는데 며칠 있다 두 명이 안 오는 거예요. '아저씨, 우리 친구 둘이 어디 갔어요?' 그러니까 '한 친구는 총 맞고, 한 친구는 지금 병원에 가 있는데 곧 죽을 것 같다'“
도용복 씨 같은 민간 노무부대원들은 전국의 전선 곳곳에서 활약했고,
당시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한 녹취가 남아있습니다.
◀ S Y N ▶ 진복균(1935년생/2019년 음성)
"아이고. 울기도. 고지 올라가다가 그냥 힘들어 울고. 그냥. 포위 당해가지고 아주 그 생각은 지금도 안 잊어먹어. 포위당했을 때 모르는 풀 뜯어 먹고 이틀간을 바위틈에서 그 쫄쫄 나오는 물 먹고.“
전사자의 시신을 수습해 후방으로 옮기거나
맨몸으로 산에 올라 물자를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 S Y N ▶ 진복균(1935년생/2019년 음성)
"시체 하나에 무조건 4명씩 맡겨. 그러면 어른들은 앞에서 양쪽에서 팔다리를 들고 내려오고 우리 어린애들은 뒤에서 뒷다리 하나씩.“
그 과정에서 폭격을 당해 목숨을 잃는 경우도 부지기수였습니다.
◀ I N T ▶ 최진성(1935년생)
"중공군들이 떼로 몰려오니까 조종사가 아군인지 적인지 모르고 막 폭격을 해서 그때 환자들 무척 많이, 우리 그 비행기 폭격에 부상돼서 사망한 사람도 많았어.“
군번도 없는 민간인들이었지만, 물자와 시신 운반뿐 아니라,
적진을 살피는 정찰 임무까지 맡았다고 합니다.
◀ S Y N ▶ 조홍식(1935년생/2019년 음성)
"민간 옷을 좀 입고 말이죠. 그 지역에 좀 갔다 오라고 말이죠. 그래서 그 지역에 가서 이렇게 인민군이 소재하는가, 있는가 없는가 알아서 이제 가서 그 대대 2과, 정보과요. G2. 거기다가 이제 알려드리고.“
이렇게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을 하고 어떤 대가를 받았을까.
스트레이트가 만난 지게 부대 생존자들은
식사만 제공받았을 뿐, 급여는 받지 못했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 I N T ▶ 이필준(1935년생)
"봉급 받은 건 미군 부대 저기 뭐야, '하우스보이' 걔들이 받았지. KSC는(한국 노무부대) 일절 없었어요.“
◀ I N T ▶ 이원기(1936년생)/'하우스보이' 출신
"(미군 부대에서) 봉급은, 돈은 없어요. 없고 그냥, 그냥 봉사로. 그냥 밥만 얻어먹고.“
이들은 왜 지게부대원이 됐을까?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지원한 경우도 있었지만,
상당수 노무부대원들은 강제로 징집당했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 I N T ▶ 이필준(1935년생)
"피란 나와선 평택에 수용소에 있는데 갑작스레 군용차가 들어오더니 철원, 김화, 평강 여기서 나온 청년들 나오라 그래요. 그날부터 이제 식사 나르기 시작해. 전방으로. 뭐 죽을 고생 했어요, 아주. 말도 못하게 고생했어요.“
◀ I N T ▶ 표기산(1935년생)
"농촌에서 농사하다가 붙들어갔지 다. 송천에서 한 열한 몇 명 갔었어요. <뭐라고 하면서 데리고 갔었어요?> 뭐 그거 알아들어요? 영어로 하는 것이라. 다 그냥 붙들어갔지, 뭐.“
연령에 관계없이 사실상 연행하다시피 끌려갔다고 했습니다.
◀ I N T ▶ 이필준(1935년생)
"연령대가 다양했죠. 60세 먹은 사람도 있고, 50세도 있고, 16세도 있고. 내가 16세였더랬어요. 그때.“
스트레이트는 미국 육군 군사사센터로부터 받은 문서에서
지게 부대 동원과 관련된 중요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국방부는 도별 할당량을 설정했다."
"사실상 강제 징용제나 다름없었으며, 징집 방식은 자의적이었고 불공평했다".
생존 지게부대원들이 말한 대로,
자의적인 강제 징집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 이승만 정부의 자의적, 임의적 징집은
국민방위군 사건에서도 큰 문제가 됐습니다.
17세에서 40세 이하 장정들을 국민방위군으로 편성하도록 했는데,
문서 상으로는 '지원제'를 내세웠지만 사실상 강제 징집으로 동원했고,
보급을 담당한 군 간부의 군수물자 착복으로
5만 명 이상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은 사건입니다.
하지만 지게 부대 동원에 대해 국내에선
'1950년, 징발에 관한 특별 조치령'으로 민간 노무자를 징발했다고만
기록돼 있을 뿐 더 자세한 내용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 I N T ▶ 양영조/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 부장
"병사구사령부(징병 담당관청)나 이런 데가 원래 동원 업무를 담당하는 데인데 그런 병사구사령부에서 생산된 문서가 거의 남아 있질 않아요. 그러니까 그 동원 기록이 없다고 봐야죠.“
스트레이트가 확보한 미군 기록에는
"한때 약 20만 명의 한국인을 고용했다",
"한국에서의 군사작전은 현지 노동력 없이는 단 하루도 지속될 수 없었다"고
적었습니다.
또 "수많은 UN군 작전의 성공이 한국인 노무자들 덕분에 가능했다"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지게 부대 사상자에 대한 기록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강원도 양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한국인 노무자 20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는 기록.
한국전쟁 기간 동안 2,064명의 민간 노무자가 사망하고,
2,448명이 실종, 4,282명이 다쳤다"고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미군이 직접 운용했던 민간 노무자들에 대한 집계일 뿐,
한국군 부대에서 일했던 이들의 피해까지 더하면 훨씬 더 많을 걸로 추산됩니다.
◀ I N T ▶ 양영조/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 부장
"국군이 운용했던 노무자의 규모도 어림잡아서 한 15만 이상은 됐을 것이다. 그 기록이 사실은 어디 있는지 지금까지도 이렇게 찾지 못하고 있어요.“
◀ I N T ▶ 이필준(1935년생)
"군번 없는 사람은 거기 끼지도 못해. 저 개죽음인 거야, 그건. 우리 같은 사람들 죽었으면 개죽음이야. 그건.“
칠곡 다부동 전적기념관 한편에 세워진 '지게 부대 위령비'.
지게부대원들의 희생을 기리는 위령비는
현재 전국에서 이곳에 있는 하나뿐입니다.
◀ 조희원 기자 ▶
앞서 본 미군 기록과 학계 연구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과 미군에서 모두 30만 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노무자로 일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민간인 신분으로 사실상 급여도 없이,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서 일했지만,
이들은 국가로부터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 '헌신'의 대가‥'무관심’
전남 여수반도 서남쪽 끝자락에 자리한 섬, 백야도.
여수항에서도 한두 시간가량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던 이 외딴 섬에서는
한국전쟁 발발 뒤에도 한동안 전쟁을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1951년 여름 어느 날.
고준채 씨의 아버지 고창석 씨는 마을 이장의 호출을 받고 집을 나섰고,
행방불명됐습니다.
◀ I N T ▶ 고준채/한국전쟁 민간 노무자 유족
"(아버지가) 금요일 날 잡혀가서 일요일 날, 3일 만에 없어져 버렸으니까. 3일 만에 없어져 버렸는데 어디로 갔는지도 어쩐지도 몰라요, 다, 아무도.“
전쟁터로 갔다는 걸 가족들이 알게 된 건, 한 달이 지난 후였습니다.
◀ I N T ▶ 고준채/한국전쟁 민간 노무자 유족
"군사 우편이 왔어요. (아버지가) 전쟁터에 끌려갔다. 그러니까 이제 그때서야 이제 사람들이 알고서 난리가 난 거죠.“
생사조차 알지 못한 채 애태웠던 2년.
다행히 아버지는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최전방 백마고지 인근에서 민간 노무자로 일했던 아버지는
고 씨에게 당시 경험을 자주 들려줬습니다.
◀ I N T ▶ 고준채/한국전쟁 민간 노무자 유족
"(아버지가) 울면서 이야기를 해요. 어렵죠. 총탄 맞아가지고 죽어가는 사람을 끌고 나온다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는 거야.“
고 씨는 지난 2000년 참전 유공자법이 제정된 이후,
돌아가신 아버지를 참전 유공자로 인정해달라고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답변은 거절이었습니다.
◀ I N T ▶ 고준채/한국전쟁 민간 노무자 유족
"(아버지가) 부대에 어디 근무를 했다든지 무슨 뭐 증명서가 있다든지 행정적으로 어떤 동원을 했다는 근거가 있어야지 되는데 근거가 아무것도 없는 거야.“
현행법에 따르면, 군번이 있거나, 복무증명서, 전사통지서 등의 서류가 있거나,
2명 이상의 인우보증이 있어야 유공자 심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군번도, 계급도 없고, 어느 날 갑자기 끌려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던 대부분의 민간 노무자들에게는
불가능한 조건들입니다.
◀ I N T ▶ 표기산(1935년생)
"<제대할 때 제대 확인증 이런 것도 안 받으셨어요?> 없어요. 없어. 없어. 다.“
보증서를 써줄 전우들을 다시 찾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 I N T ▶ 표기산(1935년생)
"<같이 근무하셨던 다른 전우분들은 만나 보신 적 있으세요?> 못 만나. 모르지, 뭐. 어디 어디 뭐 누구, 고향 사람만 알지. 70년이 지났는데 어떻게 누가 어디 있는지 알아. 다 죽고‥“
한국전쟁 당시 미군 부대에서 노무자로 일했던 이원기 씨.
참전유공자 심사에서 탈락했습니다.
다른 미군 부대에서 일했던 고향 친구들의 진술서를 증거로 제출했지만,
보훈부는 이 씨의 근무 모습을 직접 봤다는 내용이 없다며 신청을 기각했습니다.
◀ I N T ▶ 이원기(1936년생)
"국방부에서 요구하는 자료는 전부 내줬어요. 인우증명서라든지 그다음에 뭐 학교 졸업증명서, 복학 증명서 이런 거 다 제출했는데 그 통보가 기각되더라고요. 안 돼요.“
이 씨는 재작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제기했던
행정소송에서도 패소했습니다.
◀ I N T ▶ 이원기(1936년생)
"돈의 관계가 아니라 명예. 6·25 당시에 참전했다고 하는 그 명예. 그거를 하고자 한 거지, 돈에 대해서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진짜예요.“
스트레이트는 참전 유공자로 인정받은 민간 노무자들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같은 부대에 근무했던 군인들을 다시 만나 보증을 받았기에
유공자 인정이 가능했는데, 사실상 기적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 I N T ▶ 최진성(1935년생)
"텔레비전 탁 켜니까는 화면에 노인네가 출연을 했는데 ‘나 6·25 때 저 101사단 근무했는데 그게 노무자 부대야’ 그러지 뭐예요? 아, 귀가 번쩍 뜨이고, 눈이 번쩍 뜨이지 뭐예요.“
◀ I N T ▶ 이필준(1935년생)
"풍이 와서 병원에 갔었어요. 어떤 늙은이가 밤에 (병실에) 들어와. 이렇게 보더니 '아, 당신네한테 내가 밥 얻어먹은 기억이 난다' 그래. 내가 밥을 날라 줬으니까. 그때 보급을 해줬으니까.“
2000년 이후 민간노무자들의 참전유공자 인정을 위한
행정소송 판결문 40건을 입수해 분석해봤습니다.
참전사실을 인정받은 건 4건, 국가유공자 인정은 단 1건뿐이었습니다.
◀ I N T ▶ 홍석표/변호사(국가유공자 인정 사건 대리인)
”당사자가 국방부 조사한 결과에 대해서 그 조사 결과를 사실 잘 입수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민원 결과에 대해서 좀 적극적으로 해 줄 수 있는 필요는 있지 않을까 싶어요.“
30만여 명으로 추정되는 한국전쟁 민간 노무자들 가운데,
현재까지 참전 유공자로 인정받은 이들은 5천 명 수준입니다.
한국전쟁 민간인 노무자에 관한 연구는
그동안 국내 군사학계에서 거의 이뤄지지 않았고,
실태 파악을 위한 전수조사 역시 단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
◀ I N T ▶ 양영조/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 부장
"군번 없는 용사라고 그러잖아요. 그들에 대한 자료 발굴이나 이런 것도 이제 덜 되고, 있는 자료도 어느 구석에 정리 안 된 채 남아 있는지 그것도 확인이 안 되는 자료가 아마 있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국가의 필요에 의해 전쟁터에 동원됐지만,
공식 기록에서 사실상 사라진 사람들.
국가의 외면 속에 10대 소년들은 어느덧 아흔을 넘겼습니다.
대한민국 수호에 공헌했다는 단 하나의 사실을 인정받고 싶다는
그 소망은 그들에게 아직도 멀게만 느껴집니다.
◀ I N T ▶ 도용복(1943년생)
"그때 그 노무자들의 희생이 없었으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었겠습니까? 무슨 대가를 바라고 하지 않았잖아요. 국가를 위해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서 한 거 아닙니까? 그런 그 사람들이 지금 살아있다면 마땅히 대우받아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