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가 언제였던가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그 해 2001년 4월 어느 봄 날이었나봐요.
화사한 꽃편지지에 어여쁜 글씨,
마산에서 추희숙씨 편지가 도착하였습니다.
편지지에는 노란 꽃들이 피었는데,
여성시대 가족은 눈물로 그 편지를 읽었습니다.
마흔 한 살의 여인.
일곱 살 먹은 유치원 다니는 아들 희제와,
산을 좋아하는 남편이 그이 곁에는 있었지요.
그리고 어쩌면 그들보다 더 가까운 자리, 그이 곁에
유방암이 있었고요.
여섯 번째 맞이하는 아들의 생일을 축하하며 보낸 편지 속에서
어쩌면 마지막 축하일지 몰라
추희숙씨는 조금 조급하고 많이 의연하였습니다.
여성시대 가족들은, 희제 엄마를 알고 싶어하셨어요.
여동생과 엄마와 셋이 어렵게 살아 왔다는 것,
소녀 가장 노릇하며 검정고시로 남들 같은 학력을 갖추었다는 것,
시 쓰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것,
마산에서 공장에 다니다가 화장품 가게를 하다가
서른 넷, 남들이 늦다고 하는 나이에 산을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결혼해서 한 일년, 남들처럼 행복해 보다가
암이 당신을 공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던가요.
처녀 적에 들어둔 보험 덕에 희제엄마는 치료를 할 수 있었지만,
잠시 물러나는 듯하던 암은
다시 희제엄마를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희제엄마 편지가 방송되고,
여성시대 가족들이 희제엄마에게 전화로 응원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응원 편지도 보냈지요.
여성시대 가족들의 응원이 마지막 잎새가 되어
희제 엄마를 일으켜 세웠지요.
기운 내어 죽도 먹고, 일어나 앉아 있기도 한다던 기쁜 전갈-.
그 해 7월 초에 여성시대 가족 한 분이
산삼을 보내왔던 일도 생각납니다.
희제엄마에게 보내서 약으로 쓰고 싶다셨지요.
한의원에 가서 감정을 받으니 천만원에 달하는 진품이었습니다.
산삼이 마산으로 배달되고
희제엄마는 곧 일어날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서 그만이었어요.
하늘은 고집했습니다.
이 곳보다 하늘나라에 그이가 더 필요하다고요.
그 해 8월 19일, 희제엄마 추희숙씨는
차마 두고 갈 수 없었던 희제의 손을 놓고 떠났습니다.
벌써 3년이 되었네요.
누구나 한 번 왔다가는 세상이라지만,
우리 가슴에 오래 머물렀던 그 이름,
희제 엄마, 추희숙씨를 생각합니다.
가족도 아니었고, 친구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그이를 사랑했습니다.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던 여자,
인생의 한 시절은 온실에서 고이 자라 마땅하건만
그럴 수 없었던 여자,
아무도 물을 주지 않았지만 들풀처럼 스스로 자라 꽃을 피운 여자,
열심히 굳세게 살아온 한 여인이어서
우리는 희제엄마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높은 언덕에서 미끄러질 때마다
풀줄기를 잡고 매달렸을 지난한 그이의 마흔 해 세월이
어느 만큼은 나의 것이기에
우리는 희제엄마를 깊이 사랑하였습니다.
차마 두고 갈 수 없어
추희숙씨 목에 가시가 되던 어린 희제는 이제 2학년,
아빠와 손을 잡고 목욕탕에도 가고
총명한 눈 반짝이며
밝은 모습으로 잘 자라고 있다 합니다.
떠날 사람이 떠난 뒤
남은 사람들은 그렇게들 살아가지요.
자주는 잊어버리고 가끔은 기억하며
어제는 없었던 것처럼
황급히 오늘만을 건너가지요.
그리운 사람은 죽어 꽃이 된다던데
희제 엄마는
그 어디에 피어 우리를 보고 있을까요.
그리운 이름은 죽어 별이 된다던데
추희숙씨는
어느 먼 하늘에서, 나 여기 있노라, 반짝이고 있을까요.
2004년 6월, 세월의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문득 걸음 멈추고
3년 전에 우리 곁에 머물던 고운 이름,
희제엄마 추희숙씨를 생각합니다.
그이가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한 일상-.
밥 먹고 이야기하고 잠자고 다투고 일하고 외롭고 행복하고 불행하고 슬프고 기쁜, 이 사소하고도 보잘 것 없는,
그러면서도 누군가에게는 가장 절실한 일상 속에 우리가 머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