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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물망초 할머니

5월 8일 어버이 날, 부모님이 계신 자녀들은 카네이션도 달아드리고 선물도 하면서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의미있는 날이다. 그러나 부모님이 하늘나라에 계신 분에겐, 다시 한번 가슴을 치며 눈물짓게 하는 날이기도 하다.
여성시대는, 부모님이 하늘나라에 계셔서 마음을 전할 길 없는 여성시대 가족들을 위해, 전화로 하늘나라에 소식을 전하는 시간을 마련하였다. 그 날 하늘나라로 음성편지를 띄운 분 가운데, 실향민 장정옥 어르신이 있었다.

“엄마, 저 정옥이예요. 엄마, 하늘나라에도 휴전선이 있나요? 몇 년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만나셨는지요? 제가 그때 제 정신이 아니었나봐요. 어떻게 엄마를 두고 올 생각을 했는지, 용서해 주세요 엄마--”

목이 메어 중간중간 끊어지던 장정옥 어르신의 음성은 듣는 우리까지 눈물을 떨구게 하였다.
올해 칠순이신 장정옥씨는 여성시대 가족으로, 재작년에는 실향민들의 편지를 모았던 <부치지 못한 편지에 날개를>에도 참여하여 ‘가작’에 뽑혔다.

<월간 여성시대>는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그리고 올해는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6월을 맞아, 장정옥씨를 찾아갔다.

평안남도 강동군 삼등면 사단리 46번지.

사진에서 보듯, 젊은 날의 미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장정옥씨의 고향집 주소이다. 고향은 삼등면이지만, 평양시에서 더 오래 살았다는데, 장정옥씨는 상업을 하는 부모슬하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다.

다들 먹고 살기도 버겁던 시절, 책가방이라야 책보가 다인 그 시절에 밤색 란도셀을 메고, 구두를 신고 원피스를 입었던 어여쁘던 소녀는, 사촌동생들이 아버지 밑으로 입양되어서 딸 셋 중 맏이가 되었다. 명륜여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세일러복을 입고 영화도 보러 다니고, 글짓기를 열심히 하던 문학소녀였다.

해방 후 토지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재산이 많은 정옥처녀네 집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는데, 스무살 되던 해, 약혼을 했다. 고모가 중매를 섰는데, 상대는 옆동네라서 이미 알고 있던 최영만 청년이었다. 상업학교를 다니다가 회사의 경리로 일하던 잘 생기고 똑똑한 최청년은 그 언저리 동네 처녀들의 선망의 대상이어서, 정옥처녀는 흡족하였다. 최청년 역시 정옥처녀가 아니면 혼사를 하지 않겠다고 하여 이루어진 약혼이었다. 약혼을 하고 나자, 함이 왔다. 복이 많은 남자가 함진아비가 되어 함을 지고 왔는데, 온 동네 여자들이 다 구경을 왔다. 유똥을 비롯한 당시의 고급옷감들이 가득한 함을 열며 잔치집이던 그때, 10월 18일로 혼인날짜를 잡았다.

그런데, 6월 25일 한국전쟁이 났다. 약혼자는 인민군으로 징집되는 것을 피하려고 산 속으로 숨어 다니고, 폭격은 점점 심해지고 혼인날짜는 지킬 수가 없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여 평양을 점령하자, 숨어 다니던 약혼자는 치안대에 들어갔다.

정옥 처녀의 아버지 역시, 48년에 북한정권이 들어서면서 체포령이 내려서 월남하였다가 국군을 따라 평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와 재회의 기쁨을 나눈 지 한 달쯤 되었을까. 중공군들이 밀려온다고 평양이 위험하다고 하였다.
중공군이 들이닥치면 처녀들이 더 위험하다고 하여, 정옥처녀와 아버지는 잠시동안 피난을 가기로 하였다. 약혼녀는 약혼자가 근무하는 치안대에 편지를 보냈다. 먼저 월남한다고, 서울역이나 파고다공원에서 만나자고.

피난민 기차에 실려 남으로 남으로 갔다. 기차 맨 꼭대기에 앉아 있다가 옆사람이 떨어지는 것도 보았다. 걷고 또 걸어 열흘 뒤 서울에 와서 서울역이며 파고다 공원에서 며칠을 보냈지만 약혼자를 찾을 수 없었다. 다시 서울이 위험하다고 하였다. 정옥처녀는 아버지와 함께 이리로 내려와, 이리중앙초등학교 피난민 수용소에 기거하게 되었다. 한집에 가마니 한 장씩이 주어지고, 매일매일 주먹밥이나 쌀을 배급했다. 가마니를 잘라 길게 펼쳐서 모녀가 잠을 자고, 배급받은 쌀로 밥을 해 먹었다.

어느 날이던가. 그 날도 정옥처녀는 아침밥을 하려고 작은 솥에다가 쌀을 담아 쌀을 씻으러 가는 길이었다. 저쪽에서 젊은 군인 세명이 오기에, 젊은 처녀인지라,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 군인들이 스쳐가는 순간이었다.

“여보세요, 말씀 좀 물읍시다-”

한 군인이 말을 거는데, 귀에 익은 약혼자의 목소리가 아닌가. 정옥처녀는 그대로 솥을 떨어뜨렸다. 쌀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바들바들 떨리는데, 약혼자는 얼른 손을 잡아주었다. 그들은 그렇게 다시 만났다.

최영만 청년은, 치안대와 함께 월남한 뒤, 아는 이도 없고 기거할 곳도 없어서 제2국민병 모집에 응해서 군인이 되었다고 했다. 삼천포에 부대가 주둔하다가 이리농과대학 자리로 이동한지 사흘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날 약혼자는, 이리 중앙초등학교에 월남한 이들이 많다는 소리를 듣고, 약혼녀까지는 생각도 못하고, 고향사람이라도 있으려나 싶은 마음에 피난민 수용소로 가던 길이었다.

“세상에 이런 인연도 있을까, 소설이 따로 없네-”

수용소 사람들은 둘을 부러워했고 축복했다.
당시 수용소 안에는 정옥처녀와 같은 처지인 이순애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 집도 부녀만 피난을 나왔는데, 진남포에서 배를 타다가 약혼자와 헤어진 그 처녀는 정옥처녀보다 더 많이 울며 정옥처녀의 귀한 인연을 기뻐해 주었다.
정옥처녀와 아버지, 그리고 약혼자는 부산으로 옮겨 같이 살았다. 휴전이 되었고, 평양에 갈 날을 기약할 수 없게 되자, 54년 7월에 둘은 실향민들을 모셔놓고 광안리에서 결혼식을 하기로 하였다.

결혼식 날 아침, 일어나보니 세 사람은 다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저마다 북에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느라 밤새 베개를 적신 것이다. 만국기가 펄럭이는 농도원(농민회관)에서 신식결혼식을 하고, 상고출신에 경리경력이 있는 새신랑은 취직하여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아버지 역시 실향민 가운데 한 분과 재혼하여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리 행복하지 못하셨다. 새어머니는 아버지가 북한의 아내를 하루빨리 잊기를 원하였고, 아버지는 그리하지 못했다. 어느 날 딸이 아버지의 수첩을 보니, 수첩 가득 ‘박인용, 박인용, 박인용---’ 이 적혀 있었다. 바로 정옥씨의 엄마 이름. 북의 아내가 그리울 때마다 한번씩 적은 이름은 몇 장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딸인 정옥씨가 자라는 동안 부모님이 다투시는 모습을 단 한번도 보지 못했을 정도니, 아버지가 아내를 잊지 못함은 너무도 당연하였다. 새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새 마음을 요구한 것 역시 이해할 수 있는 일이어서, 이산은 이렇게 여러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는구나 - 눈물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장정옥씨는 엄마 꿈을 자주 꾼다. 꿈속의 엄마는 매번 헤어질 때 모습 그대로 마흔 서너살이고, 미숫가루와 검은 엿을 보따리에 싸주신다, 피난 가며 배고플 때 먹으라고. 그러면 스무살 정옥처녀는 “엄마, 열흘만 피해 있다가 올게, 걱정 마.-” 50년 전에 했던 말을 꿈속에서도 반복한다. 그러다 꿈은 깨고, 다시 엄마 얼굴을 볼 수 있으려나, 눈을 질끈 감고 누우면 그대로 밤이 다 새버리길 벌써 50년.

4남매 중에 외아들이었던 남편 역시, 고향의 부모님 생각에 편안한 날이 없었다. 주판 위에서 손가락이 날아다니는 것 같던 남편 덕에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지만, 남편은 고향생각에 하루하루 술이 늘었다.
술 때문에 이혼도 여러 번 생각했다. 한번은 법원까지 가서 도장만 찍으면 되는 순간인데,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던 남편이 오질 않았다. 집에 와 보니, 남편은 집에 있었다. 그때 장정옥씨는 다짐했다.

‘그래, 이혼하면 고향에 가서 어떻게 엄마를 보겠어? 더군다나 시댁은 바로 옆마을인데. 통일 된 후 고향집에 갈 생각을 해서라도 같이 열심히 살아보자.’

정년퇴직한 후에 남편은 술이 더 늘었고, 손찌검을 하는 일은 없었지만, 조용하고 자상하던 남편은 술만 취하면 가구를 던지고 부수었다. 딸, 아들을 낳고 셋째로 아들을 낳았는데, 몸이 자라지 않고 말을 하지 못하는 선천적인 장애인이었다. 그 아이를 고쳐보려고 애를 쓰는 동안 재산도 다 없앴다.
‘우리, 고향에 꼭 같이 가자, 걸어 못가면 기어서라도 가자’고 아내를 다독이던 남편은 작년 초에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장정옥씨는 밥을 먹을 때는 목이 메인다. 고향의 어머니는 구십이 넘은 노인이시니 돌아가셨을테지만,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을 하셨을까. 동생들은 밥을 굶지는 않는지 - 밥숟갈마다 고향생각이 이어진다.

얼마 전에는 베란다 창에 이름 모를 새가 와서 울었다. 장정옥씨가 내다보아도 날아가질 않았다. 4층 베란다에 날아온 새-. 장정옥씨는 우리 영감님이 아닌가 싶어서 베란다 문을 열고 막내 아들을 데리고 나왔다. 아들 손을 잡고 새 앞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우리가 보고 싶어서 온 거라면 보시구랴. 우리는 잘 있어요. 고향에는 가 보셨어요?’ 장정옥씨는 속으로 물어보며, 가만히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불렀다. 남편은 생전에 술이 취하든 취하지 않든 고향생각만 나면 “여보, 우리 노래 부르자”하곤 했다, 그러면 부부는 같이 손을 꼭 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을 불렀고 매번 서로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곤 했다.

“술을 많이 드셔서 속이야 많이 썪였지만, 그래도 영감님이 제일이야. 소주를 매일 두 병씩이나 마셨으니 간경화로 돌아가셨지. ”

혼자 된 지금, 장정옥씨는 엄마와 남편을 생각하며, 가수 조경수의 ‘행복이란’을 즐겨 부른다.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잖아요. 당신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친구들과 자주 놀러가던 모란봉과 대동문, 칠성문은 다 여전한지, 고향집에서 어머니와 여동생들은 살고 있는지. 이제 6월 13일이면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린다는데, 그 뒷소식으로 실향민들의 서신교환과 고향방문이 성사되길, 장정옥씨는 두 손모아 기도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깟 다리 아픈 거 괜찮아요. 기어서라도 갈 거니까요. 남편하고 그렇게 약속했어요.”

칠순의 할머니가 되어서도 “엄마, 보고 싶어요- 엄마, 엄마-” 하고 울먹이는 장정옥씨는, 아직 스무살 처녀다. 통일이 되는 그 날까지는 계속 스무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