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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의 시대, 더 정교한 '말'이 필요하다
이채훈 (2001년, 2003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CP)

1999년 <제주 4 · 3>으로 첫 방송을 내보낸 뒤 7년이 흘렀다. 4 · 3사건과 한국전쟁 동안 다섯 아들을 잃은 윤희춘 할머니의 피울음이 눈에 선하다. 국군에게 억울하게 희생당한 아들들이 언젠가 돌아올 거라며 차마 눈을 감지 못했던 할머니... 인터뷰 당시 103살이었는데, 몇 해 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순사건을 취재할 때, 50년 동안 숨죽이며 살아 온 피해자들이 "이제는 말할 수 있대..."라고 서로 연락하며 인터뷰에 응해 주던 유쾌한 기억도 있다. 3,000명으로 추산되는 보도연맹원이 매장됐다는 경산 코발트 광산은 취재 기간 중에 여러 번 꿈에 나왔다. 다이너마이트로 동굴 입구를 폭파하고 들어가 유골을 발굴할 때 등에 식은땀이 뻘뻘 났었지...

믿음직한 동료들과 함께 이 프로그램에 동참해서 신나게 일한 건 즐거웠다. 100편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하고 안타까운 기록들인가. 세상은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흘러가며 변화하는 큰 강물과 같다. 이 프로그램은 그 큰 강물로 흘러들어간 작은 지류였을 뿐이다. 초기의 문제의식은 단 하나였다. "앞장서면 다친다","입바른 소리 하면 손해 본다"는 왜곡된 집단 공포증과 레드 콤플렉스를 깨는 데 일조하고 싶다는 것, 가해자가 기득권 집단으로 행세했고 피해자가 목소리를 낮춰야 했던 뒤집힌 역사에 대해 항의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7년 장정을 마무리하는 지금, 이러한 취지는 어느 정도 시청자들에게 전달됐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다원화된 사회는 역사 프로그램의 변신을 요구하고 있다. 첨예한 이슈들은 여전히 남아 있고,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점점 더 다양해졌고 치밀해졌다.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이미 끝난 지 오래다. 여러 입장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배려'한 뒤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내려야 하며, 이를 위해 더욱 정밀하고 효과적인 설득 전략을 구사해야 할 때다. 역사 인식에 관한 세대차는 오히려 더 심해진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여러 세대가 공유할 수 있는 역사 인식을 도출해야 안정된 사회가 될 텐데, 100회를 방송해도 나아진 게 없다면 진지하게 반성할 일이 아닌지 자문해 본다.

우리 사회의 권력은 여전히 '무책임의 구조'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이 프로그램에서 문제를 제기한 사건들에 대해 국가기관이 공식적인 반응을 보인 적이 없다. 예컨대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은 방송을 통해 정부가 인지했을 게 분명한데도 아무 반응이 없었고, 피해 유족들의 절규는 다시 침묵 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그리고 방송사는, 아니 나는, 한번 방송했다는 이유로 진상규명과 해결에 대해 오불관언하고 말았다. 문화방송, 그리고 그 회사에서 월급을 받고 있는 나 또한 '무책임의 구조'에서 한 사슬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출연해 준 당사자들에게는 미안한 생각뿐이다.

역사 다큐멘터리는 현실과 상호작용한다. 따라서 '끝장취재'를 하는 자세로 접근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친일 문제를 집요하게 추적한 정길화, 한국전쟁의 비극을 이념적 편견 없이 조명한 김환균, 삼청교육대 사건에 현미경을 대고 메스를 가한 채환규, 육영수 저격사건을 연속 취재한 조준묵, 10·26사건의 배경과 내막을 심층 취재한 장형원, 일본 군국주의 부활의 뿌리를 추적한 박건식 등의 노력은 이런 의미에서 매우 가치 있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100편 모두 똑같이 소중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