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부터 혹독했던 금지와 검열의 역사를 헤치고
우리 노래는 어떻게 전 세계의 사랑을 받게되었을까”
# 광장을 채운 케이팝
지난겨울, 광장을 가득 채운 건
다양한 빛으로 반짝이는 응원봉을 들고
케이팝을 ‘떼창’하는 시민들이었습니다.
올해는 케이팝을 소재로 한 외국의 애니메이션이
전 세계의 사랑을 받을 정도로
우리 노래의 꺾이지 않는 인기를 실감한 해이기도 합니다.
케이팝이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이길래,
우리 시대에 이렇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걸까요?
# 8.15에도 해방되지 못한 우리 노래
우리 대중가요가 태동하기 시작한 1930년대,
사상 첫 히트곡의 등장과 동시에 우리 노래는
일제 조선총독부의 검열과 단속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933년 일제가 만들어 놓은 ‘축음기레코드 취체규칙’은
소위 ‘치안방해’, ‘풍속괴란’ 우려가 있는 곡들을 금지했는데요,
1945년 감격스런 광복이 찾아왔지만
이 규칙은 여전히 남았고,
해방이 한참 지난 1961년에야 폐지됐습니다.
# 금지, 금지, 금지!
일제가 심어놓은 악습은 계속됐습니다.
정치 권력은 노래 통제를 포기하지 않았고
문화예술윤리위원회, 방송윤리위원회, 공연윤리위원회...
위원회 이름을 바꿔가며 가요 심의를 이어갔습니다.
또 긴급조치 9호에 따른 금지곡 지정,
사회정화를 위한 건전가요 운동 등
계속해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합니다.
저항하는 청년 문화는 금세 퇴출됐고
황당한 사유의 금지곡과 검열 사례는 쌓여갔습니다.
# 사전검열과 정태춘의 6년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우리 노래는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사전심의에 시달리던 김민기는 이름을 숨기며 곡을 내기도 하고
테이프를 불법으로 제작하기도 합니다.
정태춘도 사전심의 결과와 수정지시를 거부하며
불법 앨범을 내고,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6년에 걸친 사전심의 폐지 운동을 이어가는데요,
이때 서태지와 아이들의 ‘시대유감’ 사건이
폐지 여론에 불을 붙이게 됩니다.
정태춘의 ‘6년’은 우리 노래에 무엇을 남겼을까요?
# 도움주신 분들
내레이션 : 하림
인터뷰 : 서유석, 정태춘, 김창남, 장유정, 임진모, 김윤하, 응원봉걸스 (일석, 구구, 퐁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