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모든 삼순이들을 위하여...
한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여성 중 자기가 뚱뚱하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73%를 차지하고 있다. 이 땅의 여자 열명 중 일곱 명이 자기가 뚱뚱하다고 믿고 있다는 것인데
우리의 주인공 김삼순도 그 중에 속한다. 사랑에 상처 받아 홧술로 7kg이 불어나긴 했지만 어쨌든 그녀는 스물아홉의 뚱뚱한 노처녀이다. 대학도 안나왔고,
파티쉐라는 다소 생소한 자격증이 있긴 하지만 크리스마스이브에 해고당하고, 애인도 원룸도 마이카도 없다. 그녀는 평균이다. 이상과 현실에 한 발씩 걸치고 있는
스물아홉 그 또래 여성들의 평균.
그녀들은 영화 같은 로맨스를 꿈꾸지만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안다. 일에 푹 빠져있을 때는 결혼 따위 안하고 살 수도 있을 것 같고, 돈 벌어서 평생 여행이나 했으면 좋겠고,
가끔 친절하게 구는 연하남에게 가슴 설레이고, 쏜 살 같은 시간의 흐름이 무서워지기 시작하고, 돈벼락을 맞았으면 좋겠고, 그러면 차마 버리지 못해 가슴 속에 묻어둔 꿈을
펼칠 수 있을 것만 같고...
열명 중 일곱 명, 이 땅의 평균여성들, 이 땅의 삼순이들에게 로맨스를 선물한다. 초콜릿 상자도 덤으로 부친다. 선물 받은 삼순이들, 극 중의 김삼순처럼 씩씩해지기를 바란다.
삶이 그대들을 속여도, 사랑이 그대들을 울려도, 나빠지지 말고 더 단단해지기를...
식감이 풍부한 로맨틱 코메디
뭔가에 열중하고 있을 때, 특히 사랑에 빠져있을 때, 우리의 뇌에서는 페닐에칠아민이라는 화학물질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사랑이 끝나면 그 생성이 중지되어
우울과 불안 증세에 빠진다. 재미있는 건 초콜릿만큼 페닐에칠아민을 많이 함유한 식품이 없다는 것이다. 실연은 초콜릿으로 치유된다. 달콤쌉싸름한 맛을 내면서
실연까지 치유해주는 초콜릿...
품질 좋은 초콜릿은 손바닥에서는 녹지 않고 입안에서만 녹는다. 입 안에서 녹는 식감도 남다르다. 최고의 쇼콜라띠에(초콜릿장인)가 만든 최고품질의 초콜릿처럼
식감이 풍부한 로맨틱코미디 드라마를 만들고자 한다.
<스토리는 심플하게, 감정은 깊게, 웃음은 호탕하게, 눈물은 진하게, 인생사 희노애락이 쌈빡하게 녹아있는 드라마>
그 방편 중의 하나로 등장인물들이 초콜릿상자 안에 든 봉봉과 같이 기능하도록 할 것이다. 혼자만 빛나는 게 아니라 함께 있어야 완성되는 초콜릿상자처럼, 각각의 인물들이
드라마를 풍요롭게 빛내줄 수 있도록! 만일 초콜릿상자를 열었을 때 하나라도 비어있으면 교환하거나 환불받아야 마땅하다. 불량상자 0%를 향하여 열심히 공정하겠다.
시루떡 같은 드라마...
삼순이는 방앗간 집 셋째 딸이다. 아버지는 방앗간에서 시루떡을 쪄내고 삼순이는 레스토랑에서 케이크를 굽는다.
케이크가 남녀간의 사랑의 상징이라면, 시루떡은 가족간의 사랑을 의미한다. 요즘 집에서 시루떡을 쪄먹는 일은 흔하지 않다. 비례해서 가족간의 사랑도 소흘해졌다.
하지만 삼순이네는 다르다. 비록 집이 아니라 방앗간에서지만 매일매일 시루떡을 쪄낸다. 그만큼 가족간의 사랑도 돈독하다.
따뜻한 가족이야기를 그려보고 싶다. 모락모락 뜨거운 김이 나는 드라마 속의 시루떡에 군침 흘리다가 시루떡 쪄먹는 집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시루떡 권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줄거리]
- 잔인한 크리스마스
스물여덟 살의 크리스마스이브에 삼순이는 변장을 하고 호텔에 들어선다. 얼마 전부터 수상한 기미를 보여 오던 애인 민현우를 그녀는 지금 미행하고 있다. 설마 했는데 현우는 미모의 여자와 호텔룸으로 올라가고, 삼순은 룸서비스를 가장해 룸에 들이닥친다.
삼순이가 누구인가. 전직 농구선수 아닌가. 힘차게 점프를 해 침대에 누워있는 그를, 그의 머리를, 드리블 하듯 마구 때리기 시작한다. 야 이 나쁜 새끼야, 니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하필이면 왜 크리스마스이브야. 나도 크리스마스이브에 남자친구랑 좀 있어보자. 어? 이 빤쓰! 이거 내가 사준 거잖아! 딴 여자 만나면서 내가 사준 빤쓰를 입고 싶디? 이 기집애 어디 갔어. 이 기집애는 빤쓰 사줄 돈도 없대? 이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바람난 자기 남자한테 이렇게 해댈 수 있는 여자, 많지 않다. 아무리 괄괄하고 화끈한 삼순이래도 이런 짓, 못한다. 아~ 하지만 문 밖에서 동태를 살피다가 비참한 꼴로 현우와 마주친 삼순. 커피숍에서 그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삼순은 이를 갈고 칼도 간다. 어떤 표정으로 나올까. 그 얼굴에 침을 뱉어줄 테다. 정강이도 걷어찰 테다. 너랑은 이제 끝이야! 라고 외치고 말테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한다. 대신 울음을 터트린다. 현우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동안 절절했던 사랑이 생각나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지는 신파도 떨어본다. 사람들이 쳐다본다. 그 중에는 현진헌도 끼어있다. 진헌은 조카 미주가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보살펴줄 숙모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어머니의 강요에 못이겨 맞선을 보러 나온 참이다. 그런데 한쪽에서 뚱뚱한 여자가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고불고 한다. 크리스마스 특별쇼인가보다. 진헌은 두 남녀에게 냉소를 보내고 맞선끝내기에 돌입한다. 무례하기 굴기. 맞선을 일찍 끝내는 방법. 결국 15분 만에 맞선은 끝이 나지만 그는 화가 난 맞선녀로부터 물세례를 받는다. 물에 젖은 옷을 닦으러 화장실에 들른 진헌은 삼순이 울고 있는 남자화장실 문을 벌컥 연다. 뺨에 두 줄기 계곡을 만든 시커먼 마스카라 눈물, 숨 막히는 코르셋을 벗느라 반쯤 벗어젖힌 블라우스, 쭉 뻗은 통통한 다리. 이런 볼썽사나운 여자는 처음 본다.
“뭡니까? 아줌마. 변태예요?”
삼순은 억울하다. 눈물이 앞을 가려 남,녀 화장실 구분을 못한 죄로 가슴 반쪽을 처음 보는 남자한테 공개하다니, 정말 최악의 크리스마스다. 아듀~ 다시 오지 않을 나의 스물여덟이여!
봄이 왔다. 삼순은 현우와 헤어진 스트레스로 살이 더 쪘다. 게다가 백수다. 팔자좋게 실연을 만끽할 여유도 실은 없다. 삼순은 프랑스의 '르 코르동 블루'에 유학가려고 안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다. 열심히 공부했고 실력은 자신있다. 케이크를 만들어 프렌치 레스토랑, 보나뻬띠에 면접을 보러간다. 거기서 진헌을 만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넥타이핀과 와이셔츠 단추에 머리가 끼인 비참한 모습으로... 게다가 이 왕싸가지 넥타이핀에 낀 머리를 가위로 싹뚝 잘라낸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삼순은 면접으로 준비한 케이크를 보기 좋게 진헌의 얼굴에 날린다. 엉겹결에 삼순의 케이크를 맛 본 보나뻬띠의 사장 진헌은 그녀를 파티쉐로 고용하기로 결심한다. 삼순은 이력서를 가지고 방문하라는 그의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장난으로 넘기기에는 그의 말은 힘이 있고 진지했다. 하여, 오늘 그녀는 이력서와 방금 구운 케이크와 과자 몇 개를 포장해 이곳 ‘보나뻬띠’에 왔다. 이 왕싸가지한테 심사를 당하는 게 몹시 싫지만 일단 참아보기로 한다. 진헌은 이 변태녀가 이렇게 맛있는 케이크와 과자를 만든다는 게 아직 믿어지지 않는다. 당신이 직접 만든 거냐고 두 번을 더 물어보고 결국은 그녀를 임시고용하기로 한다. 그런데 감지덕지해야 할 삼순이 제동을 건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 우리 연애할래요?
조건이 있다고? 진헌은 코웃음을 친다. 이력서를 보니 파리에서 ‘르 코르동 블루’를 졸업한 거 외에는 특별할 게 없는 경력이다. 그 경력으로 강북 최대의 프렌치 레스토랑 ‘보나뻬띠’의 파티쉐로 앉혀주겠다는데 감히 조건을 달어?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는 기상천외한 말이 흘러나온다.
“제 이름을 김희진으로 해주세요.”
그리고 한달이 흘렀다. 삼순은 보나뻬띠가 좋다. 사장인 현진헌만 빼고. 다행히 그와 개인적으로 마주칠 일이 없다. 한달에 한번 쉬는 일요일이 돌아온다. 그 날, 삼순은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맞선을 보러 간다. 오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잘 차려입고 나갔는데... 이게 웬일? 따봉! 심봤다! 백마 탄 왕자는 아니어도 민현우 그 자식에게 꿀리지 않을 정도의 늑대 한 마리가 앉아있는 것 아닌가? 너무 좋아 표정관리 안되는 김삼순, 간신히 안면근육 정돈하고 새살새살 내숭을 떨며 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꽤나 애를 쓴다. 상대도 삼순에게 관심을 보인다. 오늘 헤어질 때까지 이런 분위기라면 삼순은 그와 논스톱으로 결혼하리라 결심한다. 하지만 바로 3분 20초 뒤에 삼류신파가 벌어질 줄을 그 누가 상상했겠는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맞선을 보던 진헌은 맞선녀가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자 당황해한다. 아무리 모욕을 주고 자존심을 긁어도 이미 소문을 들었는지 먹히지가 않는다. 그때 삼순을 보았다. 그녀는 어울리지 않게 애교와 내숭을 적절히 구사하고 있었다. 망설일 것도 없이 그는 벌떡 일어나 삼순에게로 다가갔다. 목적하는 바가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강호의 고수처럼, 그는 삼순에게 다가와 칼을 휘두른다. 삼순아, 미안해! 그리고는 그녀를 덥석 안아버린다. 진헌은 연극을 하고 있다. 삼순이라는 여자를 사랑하지만 부모가 반대해 억지로 선을 보러 온 것처럼. 삼순이도 다른 남자를 만나러 온 것처럼. 우연히 한 장소에서 만나자 눈물의 해후를 하는 것처럼. 맞선녀가 파르르 떨며 나가고 맞선남은 부르르 떨며 나간다. 삼순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진헌의 따귀를 갈기고 정강이도 걷어찬다. 삼순은 무작정 걷기 시작한다. 진헌이 그 답지 않게 뻘쭘한 자세로 쫓아온다. 삼순의 하는 양을 보고는 자신이 잘못을 해도 단단히 잘못했다는 걸 간파했다. 이러다가는 쓸만한 파티쉐를 잃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된 진헌은 돈으로 승부를 걸어본다. 월급 5% 인상. 10%. 15%. 정직원 승격! 그러자 삼순이 멈춰 돌아본다.
‘당신은 누구한테 거절 당해본 적 있어요? 누구 앞에서 한없이 작게 느껴진 적 있어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할 확률이 얼마나 될 것 같아요? 당신 같은 사람한텐 흔한 일이겠지만 난 아녜요. 오늘 그런 사람을 만났어요. 내년이면 서른인데 그런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 거 같아요? 당신이 내 마지막 남은 행운을 짓밟아 버린 거라구 이 새꺄!’
진헌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다. 그깟 일이 그렇게 상처가 될 줄도 몰랐거니와 그 말 한마디가 뇌리에 박혔다. 누구한테 거절당해 본 적 있어요? 있냐고? 그래요, 있어요. 아주 처절하게, 죽을 만큼 고통스럽게, 거절당하고 버림 받은 적이 있어요. 사람들 참 웃겨. 왜 자기만 그런 상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진헌은 그렇게 되받아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돌아서는 그녀의 눈가에 얼핏 눈물이 어리는 것 같아서...
삼순은 근처에 있는 남산 산책로를 걷기 시작한다. 걷다 지치면 벤치에 앉아 홍보용 음료도 얻어 마시고 케이블카도 타고 전망대 가서 구경하고, 산책로를 걸어 내려오고, 마지막으로 포장마차에 가서 술과 밥과 안주를 먹기 시작한다. 참이슬, 우동, 김밥, 꼼장어, 계란말이... 삼순은 그걸 다 먹어치우는 신공을 구사한다. 진헌은 생각한다. 저 여자, 평생 혼자 살아도 심심하진 않겠군. 마치 먹는 신공을 보여준 삼순에게 화답하듯이. 결국 두 사람은 합석을 하고 주거니 받거니 소주를 나누어 마신다. 거기서 진헌은 삼순을 새롭게 본다. 여전히 자신을 밥맛없어 하지만 스스로 주제파악을 할 줄 알고 양심적이라는 것, 자신과는 다른 세계(평범하고 따뜻한)를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조금은 귀엽다는 것...
다음날 진헌의 오피스텔에서 삼순은 눈을 뜨고, 진헌이 자신의 옷을 벗겼다는 사실을 알고는 성난 들소처럼 분기탱천해 있는데... 그때... 현관의 자동문이 열리고 들어서는 이가 있었으니 진헌의 모친 나사장과 윤비서 두 사람이다. 나사장은 어제의 맞선 소식을 듣고 도대체 삼순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날이 밝자마자 들이닥친 것인데 벌거벗은 뚱뚱한 여자가 침대 위에 앉아있는 걸 보자 확 열이 오른다. 가라는 장가는 안가고 삼순이는 누구며 저 뚱뚱한 여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삼순은 보았다. 진헌의 차가움이 제 어머니에게서 내림하였다는 것을... 나사장은 삼순에게 예의를 갖추어 말하지만 눈매만은 그지없이 서늘하다. 나사장은 진헌에게 삼순을 데리고 정식으로 인사를 오라고 이르며 오피스텔을 떠난다. 졸지에 진헌의 애인이 된 삼순은 따로국밥집에서 또 한번 놀라게 된다. 선지가 듬뿍 든 국밥을 앞에 두고 진헌이 이런 말을 한 것이다.
“김삼순씨! 우리, 연애할래요?”
... And the story goes 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