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1836-1903. 자(字)는 흥재(興齋).
운남성(雲南省) 미륵현(彌勒縣) 출신.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난 그는 어머니가 시집올 때 예물로 가지고 온 옥팔찌를 팔아서 마련한 은 10냥을 밑천으로 장사에 뛰어들었다.
대상(隊商)을 거느리게 되면서부터 장사에 눈이 트이기 시작한 그는 중경(重慶)에 오늘날의 은행격인 ‘천순상 전장(天順祥錢莊)’ 설립하고 발전시켜 사천, 귀주, 운남 간의 무역업의 강자로 부상했다.
뒤이어 중국에서 시장경제가 움트는 대세를 포착한 왕치는 거대한 자본을 투자해 곤명(昆明)에 ‘동경풍(同慶豊)’이란 상점을 필두로 하여 당시 중국의 총 22개 성 가운데 북경, 상해, 광주, 중경, 곤명 등 15개 성 및 홍콩, 베트남, 말레이시아에 연이어 지점을 설립했다.
그를 통해 왕치는 중국 금융업의 개산조사(開山祖師)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동천동광(東川銅鑛)과 개구주석광산(個舊鑄石鑛山)을 개발해 국부의 유출을 막았으며, 곤명에서 최초로 전등회사와 수돗물회사를 설립했으며, 독일의 발전기를 도입해 중국 최초의 수리발전소인 석룡패(石龍 ) 발전소를 건설했다.
왕치는 돈을 잘 벌었을 뿐만 아니라 돈을 잘 쓸 줄도 알았다.
광서제 26년(1900년),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쳐들어가 자희태후가 황급히 서안으로 도망을 갔을 때 왕치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 불구하고 외국침략자를 물리친 다음에야 국내의 일을 논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전력을 다해 피난 비용을 지원했다.
전쟁이 끝나고 국고가 텅 비게 되자 왕치는 다시 한번 거액을 기부했다. 뿐만 아니라 산서성(山西省)과 섬서성(陝西省)에서 가뭄이 들자 왕치는 아낌없이 은 수백만 냥을 수리공사에 기부하는 등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의 정치가 이홍장(李鴻章)는 그의 재산을 가리켜 “청나라의 국고와 같다”는 찬사를 보냈다.

또한 왕치는 뛰어난 선각자이기도 했다.
장학재단 성격의 ‘흥문당(興文當)’을 설립해 가난한 학생들을 지원했다.
1903년 홍하주(紅河州) 석병현(石屛縣)의 원가곡(袁嘉谷)이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했을 때는 천하에 공지하기 위해 운남성에 그 유명한 장원루(狀元樓)를 세우기도 했다.
그 외에도 사재를 들여 곤명에 동인가(同仁街)를 건설했고, 곤명에서 벽계관(碧 關)까지의 석판도로(石板道路)를 깔았으며, 남반강(南盤江)에서 현수교 3개를 건설하기도 했다.
청나라 조정은 왕치의 이러한 의로운 행동에 대해 ‘급공호의(急公好義:대중의 이익을 위해 열성을 다한다)’라는 편액과 일품홍정상인(一品鴻頂商人)의 작위를 하사했다. 그리하여 왕치는 중국 역사상 유일한 일품홍정상인이 되어 ‘이품홍정상인’인 호설암(胡雪岩)의 명성을 능가했다.

'Times'는 19세기 세계갑부들 중에서 동양인으로는 유일하게 왕치를 세계 4위의 갑부로 선정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