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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인 재섭(이훈)은 다가오는 겨울 방학이 끝나면 인생을 선택해야 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중이다. 물론 대학입시를 걱정하거나 자신의 진로 문제에 대한 걱정은 전혀 아니다. 학교에 낼 납부금을 어머니(정혜선) 모르게 몽땅 써 버린 것이 그의 고민이다. 
아버지와 헤어져 남의 집 식당 일을 하며 힘겹게 삼남매(재섭, 재국, 재옥)를 키워온 어머니. 
어머니에게 있어서 막내 재섭은 골치 덩어리였다. 애초에 공부하고는 인연이 없었던 재섭. 허구한 날 동네 개구쟁이들과 싸움질하며 생계에 바쁜 어머니를 학교 교무실에 들락거리게 했고, 지금 다니는 학교도 이미 다른 학교에서 퇴학을 맞아 어머니가 누나 재옥(지수원)과 함께 눈물 뿌리며 애걸복걸 학교 문턱이 닳도록 쫓아다녀 재입학 시킨 처지였다. 

재섭은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같이 퇴학당한 친구 창배(이종수)의 유혹으로 황씨네 쌀집을 털기로 모의하지만 돈 통을 들고 달아났던 창배는 망을 보던 재섭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 날 수업시간에 훈육주임에게 불려나간 재섭은 학교를 찾아온 형사에 의해 경찰서로 연행된다. 집안이 발칵 뒤집어지고.. 먼저 경찰서에 들어와 있던 창배는 치사하게 모든 것을 재섭에게 미루지만 재섭은 묵묵부답 굳이 변명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 날 밤 재섭은 피의자 대기실에서 같은 또래의 여학생 설희(장신영)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두 갈래로 땋은 단정한 머리와 깔끔한 교복차림의 설희는 책가방 가득 양담배를 넣고 가다가 불심검문에 걸려 양담배의 출처를 추궁 받고 있는 중이었다. 형사들의 추궁에 묵묵부답 눈물만 흘리는 설희.재섭의 눈에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악마의 소굴에서 고통받는 듯 그녀의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경찰서의 밤이 깊어가고 담당형사가 다른 잡범에게 시선이 가 있는 사이 설희가 재섭에게 속삭이듯 말을 건네더니 ‘미안하지만 심부름 하나만 해 줄 수 없겠냐’고 애원하며 브래지어 속에 감춰 두었던 비닐 봉투를 한 뭉치 건네는 게 아닌가.. 
얼떨결에 비닐 봉투를 교복 안주머니 속에 집어넣은 재섭. 이윽고 날이 밝아오자 쌀집 황씨의 너그러운 용서로 인해 훈방 조처 되는 재섭은 어머니와 함께 경찰서를 나온 재섭은 설희가 자신에게 건넸던 비닐뭉치를 은밀하게 풀러본다. 그것은 대마초였다. 

이제는 도둑질까지 해 집안망신을 시킨다며 형 재국(이진우)에게 죽지 않을 정도로 매를 맞은 재섭은 맞은 것에 대하여 억울할 것도 원통할 것도 없었다. 형 재국은 장안의 수재들만 다닌다는 일류 대학 법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고 누나인 재옥은 여상을 나와 연탄공장 경리로 취직하여 장녀로 집안 살림살이에 큰 도움은 안되지만 나름대로 저 시집갈 준비와 제 앞가림은 알뜰하게 하는 터였다. 

어머니 한 여사가 형 재국에게 갖는 기대는 엄청났다. 남들은 자식사랑은 내리사랑이고 막내는 집안에서 제일 귀여움 받기 마련이라고들 하지만 그것은 남들 얘기지 한 여사는 달랐다. 집안에 들어오는 먹거리든 무엇이든 좋은 것은 재국의 차지였다. 그것은 묵계였고 불문율이었다. 

그렇다고 재섭이든 재옥이든 어머니의 편협한 사랑에 대해 질투를 느끼거나 원망한 적은 없었다. 머리 나빠 똥통학교 나온 누나와 현재 이 학교 저 학교 죽지 못해 다니고 있는 재섭. 일류 고등학교 나와 일류 대학 다니는 자랑스러운 형님 앞에서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만일에 형이 이 세상에 없고 나와 누나만 있었다면 불쌍한 우리 어머니는 누굴 믿고 살겠는가. 무슨 희망으로 살겠는가. 재섭은 항상 그렇게 생각했다. 

재섭은 죄 값을 치르느라 도서관 한쪽 구석에서 반성문을 쓰며 무기 정학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반성문을 쓰려고 볼펜을 들 때마다 설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눈물 젖은 얼굴로 슬픈 사슴처럼 젖가슴 깊은 곳에서 대마초 비닐봉투를 건네주던 설희. 마치 신데렐라가 남기고 간 유리구두인 냥 재섭은 방안 은밀한 곳에 감춰두었던 대마초 비닐봉지를 꺼내보며 설희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며칠 후 첫눈이 내리는 날 설희는 나타났다. 노란 우산을 쓰고.. 
맛나당 빵집에서 설희가 사주는 빵을 먹으며 재섭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눈이 부셔 도저히 설희의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고 무슨 말인가 대꾸를 하려해도 자꾸 얼굴이 화끈거리며 말문이 막혀 왔다. 재섭은 사랑에 빠졌다. 첫사랑이었다. 

설희는 아버지의 얼굴조차 모르고 태어나 속칭 PX 양키물건 장사하는 어머니와 동두천 어디에서 양공주 생활을 하고 있는 언니 규희, 그리고 대마초 사범으로 지금 현재까지도 수배중인 오빠 병근을 가족으로 두고 있었다. 미군부대를 기웃거리다 양공주로 전락한 채 국제결혼을 꿈꾸는 규희와 그 꿈을 부추기며 딸이 미군과 결혼하여 아메리카로 건너가길 간절히 바라는 어머니. 설희의 어머니는 탐욕스러웠고 돈이라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먹을 것처럼 집착이 강했다. 설희는 그러한 언니와 엄마가 항상 부끄러웠다. 

그리고 내심 자신은 언니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통학버스에서 내릴 때도 자신의 동네를 꼭 한 정거장 지나친 뒤 내리는 설희. 언젠가 재섭이 왜 여기에서 내리느냐고 물었을 때 설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판자촌 입구에서 내리면 뒤 꼭지가 따갑다고.. 설희는 자신이 사는 동네조차 입에 담기 싫어했다. 

설희는 콧대높고 자존심 강한 만큼 허영심도 강했다. 적어도 설희에게 있어서 재섭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다. 물론 재섭의 착하고 진실한 속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재섭의 사랑을 받아들이기엔 자신의 청춘이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설희가 재섭을 멀리하면 멀리할수록 재섭은 끈질기게 설희에게 달라붙었다. 그럴수록 설희는 재섭에게 모멸감을 주고 재섭을 마치 노예처럼 부려먹었다.